노무현 –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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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와서 처음 산 책. 단숨에 다 읽었다. 담담했지만 쌉싸름한 느낌의 책이었다.

p30 – 나는 대통령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국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 시민으로서 성공할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현직에서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사랑받고 싶었다. 내게 남은 시간 동안, 훌륭한 시민으로 살고 싶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p34 – 하지만 나는 언제나 양심과 직관이 명하는 바에 따라, 스스로 당당한 사람으로 살고자 몸부림쳤다. … 나는 이 집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

P52 –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p61 – 서로 사랑했지만 혼인은 순탄치 않았다.

p63 – 겨우 혼인을 하고 막 공부에 몰두하려던 1973년 5월 14일, 내가 아버지처럼 우러러보았고 나를 끔찍이도 아껴 주었던 큰형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p65 – 아내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벌레가 사람이 된 것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나도 아내도, 그 순간만큼 큰 성취감과 행복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p69 – 실랑이 끝에 발길을 돌리면서 그 아주머니가 말했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삽니까?”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힌 이 한마디는 수십 년 동안 내게 고통을 주었다. … 어린 시절 어머니는 수도 없이 당부하셨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법 앞에 장사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어머니는 “갈대처럼 살라” 하셨다.

p83 – 양심이니 정의니 말은 쉬웠지만, 내 아들한테 고난의 삶을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민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은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받을지 모르는 고통을 예방하는 길이었다.

p86 – 문재인 변호사는 이 모든 일을 함께했다. …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한 것은 그저 해 본 소리가 아니다. 나이는 나보다 젊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친구로 생각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며 영광이었다.

p87 – 자기 자신도 산업재해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산재사건 증인으로 나온 노동자, 산재사건 재판을 하면서 산재로 난청이 된 증인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짜증을 내는 판사와 변호사, 모두가 부조리극에 나온 배우 같았다.

p88 – 헌법에서 일반 법률까지, 내가 공부한 법률 체계는 모두 상대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상대주의 철학은 전체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기초를 버릴 수 없었다.

p96 – 아내는 다른 평범한 변호사나 사업가의 아내들처럼 살고 싶어했다. 특히 경제 생활에 관한 한 나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가 말을 하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돈을 구해다 주어야만 했다. … 해양수산부 장관을 할 때 매월 봉급이 통장으로 꼬박꼬박 들어온다면서 아내가 함박웃음을 짓던 일이 떠오른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아내는 경제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두가 내 책임이다.

p101 – 그래서 며칠 동안 집에 들어앉아 내 인생과 미래의 포부를 글로 정리했다. … 경찰은 내 눈앞에서 노동자들을 끌어가고 노점상 포장마차를 뒤집어엎었지만 도울 방법이 없었다. 예전에 같이 얻어맞고 끌려갔을 때는 고통을 함께 겪는 떳떳함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 없었다.

p103 –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p105 –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 주지 않았다.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고 말했던 정주영 회장이 마침내 말문이 막혔다. 결국 바른말을 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이게 되었던 것은 국민들과 눈높이가 맞았기 때문이었을 뿐,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p108 – 명패를 어디로 던졌든 상관없이, 그것은 분노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 이때 만들어진 부정적 이미지는 오랜 세월 정치인 노무현을 옥죄었다. 나는 미숙한 정치인이었다. 잘못된 세상에 대한 크고 강한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고 표현해야 할지 아직 터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p111 – 열흘 만에 집에 전화를 했다. 정치하는 것을 반대했던 아내가 이번에는 화를 냈다. 사표는 왜 썼느냐, 썼으면 당당하게 다녀야지 비겁하게 도망은 왜 다니느냐, 그렇게 한참을 퍼부었다.

p116 – 3당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p119 – 이해찬과 같은 사람을 공천하지 않는 정당이라면 나도 탈당하겠다고 했다. … 이해찬 의원은 앞으로 ‘노무현 계보’를 하겠다고 우스개를 했다. 그는 사심이 없고 믿을 만한 사람이다. 매사에 실용적인 태도로 유능하게 일을 처리한다. 국무총리도 그렇게 잘 해냈다.

p123 – 내 선거구호는 무척 거창했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 … “대붕역풍비 大鵬逆風飛 생어역수영 生魚逆水泳”

p132 – ‘노하우’를 개발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했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종류와 원리를 익혔다.

p136 – 당시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화백이 그렸던 만평이 기억난다. 서울에서 김대중 이사장이 지원사격을 하면서 “지원사격 받았나?” 하고 묻는다. 만신창이가 된 노무현이 대답한다. “내가 맞았다. 오버!”

p160 – 우리 현대사의 존경받는 위인은 왜 패배자뿐인가? … 정의가 패배하는 역사를 반복하면서, 아이들에게 옳은 길을 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p165 – 노사모 회원들은 뚜렷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 기분이 좋으면서도 착잡했다. 나는 변호사로서 국회의원으로서 늘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도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노사모는 30대 회사원이 많았고 학력도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었으며 사는 형편도 나쁘지 않았다. 자기네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었거나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를 지지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원칙, 진실, 정의, 그런 보편적 가치를 지지한 것이다. … 노사모는 창의적 아이디어로 큰 기업을 만들고서도 전셋집에 그대로 산다는 안철수 박사를 존경했다. 수천억 원의 자산을 가지고도 손수 운전을 하는 게임회사 사장을 좋아했다. 노사모의 문화를 보면서 대한민국에 새로운 주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p166 – 노무현을 버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내 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노사모였다.

p201 –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다가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는 제목으로 1면을 시커멓게 깔아놓은 [조선일보]를 보았다. 내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런데 그 시각 수많은 지지자들이 동네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남의 집 현관에 놓인 [조선일보]를 몰래 치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 나는 몰랐다.

p206 – 그렇게 해서 새 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었다. … 그래서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고 싶었다. … 내 운명은 새 시대의 첫차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차가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p233 – 대통령으로서 품격과 위엄이 부족했다. 나는 체질적으로 허리를 잘 굽히는 편이다. … 나는 말을 위엄 있게 행동을 기품 있게 해야 하는 환경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언어와 태도에 관한 한 나는 분명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 무엇보다 말이 문제였다. 나는 구어체 현장 언어를 구사했으며 반어법과 냉소적 표현을 즐겨 썼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인권변호사로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이런 언어습관이 생겼다. … 퇴임한 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과 토론을 보았다. 그는 사회적 소수파에 속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지만 매우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나도 그렇게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p240 –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그날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 이 쉼터에 올라가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부근까지 불빛이 보인다.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무어라고 소리치는지는 알 수 없다. 멀리서 사람들이 외치는 함성이 아련히 들릴 뿐이다. … 용암처럼 일렁거리던 촛불 바다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보았다. …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밤마다 촛불을 들고 와서 나를 탄핵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 무엇을 요구할까?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p267 – 김 위원장이 갑자기 체류 연장을 제안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조금 당황했다. …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말했다. “그거 결정 못 합니까?” 내가 대답했다. “큰 것은 내가 결정해도 작은 것은 내가 결정 못 합니다.” … 그냥 정직하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는데, 결과적으로 제법 괜찮은 대답이 되었다.

p275 –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p281 – 내가 대통령이던 5년 동안 대한민국 언론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언론 자유를 누렸다. 그들은 자기네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했다. 나는 다만, 언론 앞에서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대통령이고자 했다. 그뿐이다.

p292 – 이런 대통령 선거는 처음 보았다. … 지난 시기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교체와 같은 민주주의 가치, 역사의 정통성, 권위주의 해체, 법치주의의 실현, 사회의 공정성과 투명성, 그런 것들이 주제가 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도 이회창 후보가 ‘반듯한 사회’를 주장했고 나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떳떳한 국민, 당당한 나라’와 같은 가치를 선거구호로 내걸고 선거전을 했다. … “경제 잘하는 솜씨 좋은 대통령이다.” 이런 주장만 들렸다. 지도자의 도덕성 검증도 흐지부지 지나갔다. … 정말 중요한 것은 정당과 후보의 정체성이다. … 진보 보수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원칙을 아는 정치인인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이다. 일관성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보든 보수든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295 – 모든 패배는 쓰라리다. 그러나 원칙을 잃은 패배는 더욱 쓰라리다. 원칙 있는 승리가 가장 좋다. 원칙을 지키면서 지는 것과 원칙을 어기면서 이기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지는 상황과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이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서 패배하는 것이라는 데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원칙을 지키면서 패배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원칙을 잃고 패배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p328 – 다음날 수백 대의 카메라 사이를 걸어 유시민 장관이 왔다. 오지 말라고 했었지만 막상 오니까 반가웠다. 그다음에 이해찬 총리와 한명숙 총리도 왔다.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오랜만에 웃었다. 다들 위로의 말을 해 주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p330 – 새벽 두 시에 대검찰청을 나왔다. 그떄까지 사람들이 노란풍선을 들고 서 있었다. 밤새 차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내 생애 마지막 외출이었다. 검찰이 신속하게 기소할 것으로 보고 틈틈이 진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언론보도는 계속되었다. 아내를 다시 소환한다는 말이 돌았다.

p330 –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와 검찰,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라고 조롱했다. 노무현의 인생만이 아니라 부림사건 변론을 맡았던 이래 내가 했던 모든 것을 모욕하고 저주했다. … 그들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로 만들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나를 도와주고 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했던 분들을 향해 말했다. 노무현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는 아니라고. … 노무현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졌으니 노무현을 버리라고.

p331 – 모든 것이 내 책임이었다. 대통령을 하려고 한 것이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꾼 지도자가 되려고 한 것이 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원망할 수 없었다. … 가난하고 억눌린 노동자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다만, 애초에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p346 – 그는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화려한 학력도 없었다. 힘있는 친구도 없었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열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연민과 분노와 열정의 힘만으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처음에 혼자였던 그는 마지막에도 혼자였다.

p350 – 1987년 6월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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