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나이때문에 술을 못마신다는게 한스러울 정도였던 때가 있었다.
친구들이랑 같이 술집에 갔는데 생일을 불과 몇주 남긴 내 주민등록증 앞에서 술집주인은 술을 팔지않겠다고 했다.
어떤 오기같은게 생겼다.
(난 별것도 아닌 일에 잘 흥분하고,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손꼽아 기다리던 생일날, 그때 그 친구와 당당히 술집에 들어갔다. 01학번이라고 이름쓰여진 학교 교재를 옆에 끼고.
김빠지게도 그날 검사는 없었다.  처음으로 내 돈 내고 마셔보는 맥주가 너무 맛없게 느껴졌다.
내가 마시고싶었던 건 맥주 그 자체가 아니라, 퐁퐁 솟아나는 거품 속에 숨겨져 있을것만 같은 일탈과 자유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그 뒤로도 난 가끔 맥주를 마셨던 것 같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오는 깜깜한 거리에서, 잊고 싶은 기억을 안주삼아.
맥주 한캔을 손에들고 거리를 걸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뿌듯해지곤 했었다.
꾹꾹 눌려있던 일상에서 벗어나고싶은 욕구와 나는 그렇게 맥주 한캔으로 타협을 하곤 했다.

혼자 술집에가서 술을 마셨다는 현우의 일기를 보고는 그런 내 모습이 떠올랐다.
동네수퍼에서 맥주를 사려다가,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파마를 하고 염색을 했던 기억까지도.

오늘 문득,
손에 들린 맥주 한캔이 그리웠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면서, 일상이 숨막히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모든게 똑같았다.
오늘 따라 거리는 환했고 사람들의 표정도 환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녀석은 나와 같은이유로 술을 마시진 않았을거다
그렇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큼만 이라고
녀석에게 하는 말인지,
나에게 하는말인지
…  

One thought on “4.9”

  1. 흐음…쩝…전 무지하게 술 싫어하는데요..
    보라님의 글을 보니..저의 아픈 경험들이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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