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sure.org

Category: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 황동규 시집

    두 세상 사이에 서서 오도 가도 못 하고. – 황해 낙조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 쨍한 사랑노래

    길은 가고 있어요.
    보이는 길은 가는 길이 멈춘 자리일 뿐
    가는 것 안 보이게 길은 가고 있어요.

    혼자임이 환해질 때가 있다. –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아무래도 나는 너무 환한 곳
    사방이 물비누로 정갈히 씻은 본 차이나 같은
    실하고 눈부신 곳으로는 못 가리. – 해마

    그래도 열 손가락으로 헷갈리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 세다 세상 뜬다는 것
    얼마나 자지러진 휘모리인가. – 은행잎을 노래하다

    태풍 직전
    바람 없음이 태풍의 눈이듯
    그대 없음이 이 세상의 눈이다.

    도처에 그대가 없다. – 지상의 속모습

    추억의 힘줄은 불수의근이니…… – 추억의 힘줄은 불수의근이니

    종려 가지 흔들며 반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에 발 들여놓기 전 예수에게 제자 하나가 물었다.
    “가르치신 온갖 비유와 우화를 한마디로 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라!” – 두 문답

    소로(Thoreau), 소로, 그대의 휴대용 아나키즘을 뭉개고
    어느 날 새벽
    군인들이 포를 끌고 시내에 들어왔다.
    친구들이 허름한 간판들 뒤로 숨고
    나는 입대했다. – 병나발은 독주 악기이니

    어둑한 마음속에 불끈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올려보며
    한번 부르르 몸을 떤다. – 겨울날, 아내는 요즘 들어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가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면,
    초여름 새벽을 가라. – 초여름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