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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황산은 사실 산성이 아니다

Tragedy is like strong acid – it dissolves away all but the very gold of truth. — David Herbert Lawrence

비극은 진실만 남기고 모두 녹여버린다는 점에서 강한 산과 같다. — 데이빗 허버트 로렌스

설탕에 진한 황산을 부은 모습 - 출처: scienceclarified.com

산과 염기는 중요한 화학 개념 중 하나다. 산은 산성비로 세상에도 널리 알려져 있을 뿐더러, 그 중에서 특히 염산과 황산 같은 강산들은 배트맨의 조커를 연상시키면서 섬뜩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강한 산이다’라고 말하려면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산과 염기를 구분하는 개념은 화학이 발전해 오면서 점점 더 포괄적인 범위로 넓혀져 왔다. 처음에는 H+ 이온을 내는 물질이 산, OH 이온을 내는 물질이 염기로 정의되었다. (아레니우스 Arrhenius) 그 뒤에 더 많은 화합물이 발견되면서 H+를 받아들이는 물질을 염기라고 더 넓혀 정의하게 된다. (브뢴스테드 Bronsted) 근래에는 화학반응 시 전자쌍을 받는 쪽이 산, 주는 쪽이 염기로 정의된다. (루이스 Lewis) 여기서는 H+ 이온을 많이 내면 강한 산이라고 생각하고, 강한 산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염산과 황산 두 가지를 살펴보자.

염산은 염화수소(HCl)라는 기체를 물에 녹인 용액이다. 기체를 녹인 것이기 때문에 “100% 염산” 같은 것은 못 봤고 내가 본 가장 진한 용액이 38% 짜리 염산이었다. 원래 기체기 때문에 염산은 뚜껑을 열면 뿌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독가스다. 조금 마신다고 바로 죽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볼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보통 환기구가 달린 후드에 넣고 용액을 뽑아서 실험하게 된다. 농축액 염산을 그대로 실험에 쓰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이것을 물에 희석시켜서 원하는 산도의 용액을 만들어서 실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염산을 뒤집어 쓰면 새까맣게 타들어 갈 것으로 알지만, 종이에 염산 원액을 조금 묻혀 봤을 때 별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봐서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부식성이 강하고 가스 자체가 독성이기 때문에 뒤집어 쓰면 생명에 위협이 되긴 할 것이다. H+를 떼어내고 나면 Cl만 남기 때문에 플라스틱 제조 공정 같은 곳에 많이 쓰인다고 한다.

황산은 염산과 달리 H2SO4라는 물질 자체가 상온에서 액체다. 진한 황산이 바로 그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무시무시한 산이다. 실험실에 있는 진한 황산은 98% 정도인데, 병을 들고 흔들면 걸쭉한 액체가 철렁거린다. 앞에서 말했듯이 강한 산은 H+ 이온이 많아야 하는데, 진한 황산은 액체 전체가 H2SO4라서 H+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한 황산이 물과 섞여야 비로소 강한 산이 되는 것이다. 진한 황산은 물먹는 하마와는 비교도 안 되게 물을 빨아들인다. 물먹는 하마는 그나마 분자 상태로 있는 온전한 H2O를 흡수하는데, 진한 황산은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를 가지고 있는 어떤 분자라도 닿으면 다 뜯어서 물로 만들어 놓고 빨아들인다. 위에 사진은 설탕에 진한 황산을 부은 것인데, 설탕의 H와 O가 빨려서 물로 변하고 남은 탄소만 잿덩이로 남아있는 모습이다.

실제 실험실에서 진한 황산을 종이에 몇 방울 떨어뜨려 보니 정말 종이가 까맣게 타들어간다. 물을 이렇게 좋아하기 때문에 진한 황산을 희석할 때는 반드시 물에 황산을 넣어야 한다. 황산에 물을 넣는 것은 사파리에 고깃덩이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물에 황산을 천천히 섞어도 발열 반응 때문에 용액이 따뜻해질 정도다. 이런 특성 때문에 고도로 건조한 환경에 화합물을 보관해야 할 때도 황산을 이용한다. 이렇게 무서운 존재지만 실험에 자주 쓰이기 때문에 실험복을 입지 않고 실험하면 며칠 뒤에 옷에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을 정도로 화력이 대단하다. 황산은 산업 공정 각 단계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현대 화학 산업에서 가장 많은 수요가 있는 화합물이기도 하다. 2001년 기준 1억 6500만 톤이 생산됐으며,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8조원 정도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산의 세기를 계량하는 것은 수소이온의 농도기 때문에 위의 두 가지 산 말고도 강산은 많다. 브롬, 요오드 등 할로겐 족 원소의 음이온과 수소 이온이 결합해서 생긴 산들은 염산과 친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Hydrobromic acid (HBr)과 Hydroiodic acid (HI)은 사실 염산보다 산도가 높다. 불소(F)의 경우에는 H-F의 수소결합이 강해서 강산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밖에 빛과 반응하기 때문에  갈색 플라스틱 병에 넣어두는 질산(HNO3)도 대표적인 강산이다. 질산은 산화력이 강해서 귀금속류로 분류되는 구리까지도 부식시켜 녹여버린다. 마지막으로, 실제 실험하면서 많이 보진 못했지만 책에서 종종 언급되는 산 중에서 가장 센 산은 Perchloric acid (HClO4)라는 산이다. 보통 음이온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H+이온을 잘 놓아줘서 산도가 높아지는데 ClO4는 그냥 Cl-도 아니고 주변에 산소 원자를 네 개나 끼고 있는 덩치큰 음이온이니, H+ 하나 정도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