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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100가지 화학적 특성 쓰기

물은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 필수적인 잘 알려진 화합물이다. 보통 “물”은 액체 상태만을 지칭하지만, 얼음이라는 고체 상태와 수증기라는 기체 상태로도 존재한다. 지표면의 71%를 덮고 있다. 대부분 바다에 있으나, 일부는 지하수나 구름으로 존재한다. 바다가 지표에 존재하는 물의 71%를 차지하며, 빙하가 2.4%, 강과 호수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 Wikipedia

물의 분자모형과 수소결합 - 출처: 위키백과

한창 화학을 공부할 때 한 선생님께서 이런 화두를 던져주셨다. “오늘 집에 가서 빈 종이를 하나 펴고 물의 화학적 특성에 대해서 100가지를 적어보세요.” 딱히 숙제랄 것은 아니었지만, 순진한 나는 그 날 집에 와서 빈 종이를 꺼내 들고 앉았다. 제일 위에 “물”이라고 커다랗게 써 놓고 아래에 1부터 100까지 숫자를 적어 넣었다.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어는점과 끓는점이었다. “어는점 0도, 끓는점 100도”를 적었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로 이루어짐. 4도씨에서 밀도가 가장 높음. 기름은 안 녹고 소금은 잘 녹이는 극성용매. 수소결합이 분자간 결합력 중에서 지배적임. 약 20가지의 특성을 꾸역꾸역 적어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도저히 더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죄다 위에 쓴 것과 겹치는 내용 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위에 썼던 것을 쪼개서 두세개로 분리해 보기도 했지만 30가지를 넘기긴 힘들었다.

이렇게 한 분자에 대해서 100가지의 특성을 쓰는 것을 해보면, 20번째 특성을 넘어가면서 느끼게 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화학 – 아니면 옆 동네의 물리나 생물까지의 – 지식을 총 동원하고 있지만 더 이상 채워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당시에 나는 더 쓸 수 없게 막히게 되자 분광법 책까지 뒤적거리면서 뭔가 쓸거리가 없을까 생각해 봤다. 당시에 공부를 할 때는 주로 방법론적인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개개의 분자에 대해서 집중했던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이 숙제는 더 기억에 남았다. 방법론을 배운 후 그것을 적용할 대상을 바꿔가며 공부해 왔다면, 이 숙제는 적용할 대상을 고정시켜 놓고 자기가 배워왔던 모든 방법론을 갖다 붙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뒤로 꼭 화학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이 생각하는 방식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자는 이런 방식은 암기력을 요하던 20세기 교육에서나 유효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은 백과사전만 잠깐 봐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굳이 자기 머릿 속에 다 담고 있어야 하느냐고 말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백과사전에 나온 물의 특성에 대한 데이터시트를 들고 100가지가 아니라 50가지만 써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정보의 편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지식이 되는 것인데, 보통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각 정보들이 서로 이어붙는 패턴까지 어느 정도 배우게 된다. 이런 패턴을 깨고 새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이어붙이는 느낌을 알아야 새롭다고 할 수 있는 지식이 나오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포물선”에 대한 100가지 이야기를 적어본다고 상상해 보라. 2차 방정식, 제곱근과 같은 꼭지부터 시작해서 안테나까지 생각보다 다양한 정보가 새롭게 달라붙음을 느끼게 된다.

뭔가를 공부하는 것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100가지 특성 쓰기”를 생각해 보면 또 재미있는 적용 대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 100가지 쓰기를 해보자. 부모님, 친구, 연인 누구든지 한 사람을 잡고 그 사람의 특징을 100가지 쓴다고 하면 이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한 번 상상을 해봤다. 처음에는 “키는 얼마, 몸무게는 얼마”라는 것과 같이 그 사람의 수치화된 특성부터 생각이 날 것이다. “집주소는 어디고 휴대폰 번호는 몇 번”과 같은 그 사람에 딸린 특성이 그 다음으로 떠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이 상대적으로 짧다” 등 주관적이며 세세한 것까지 끌어올리게 될 것이다. 나도 상상만 해본 것이지만, 쓰고 나면 그 대상에 더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이 든다. 생각으로부터 말과 글이 나오기도 하지만, 말과 글로부터 생각이 영향을 받기도 하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숙제를 내 주셨던 선생님은 단순히 물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하려고 화두를 던지셨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느꼈던 점은 세 가지다. 첫째는 화학에 대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 붙임으로써 생각하는 패턴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 것. 둘째는 그렇게 공부한다고 했는데도 내가 생각보다 화학에서 끌어올릴 스토리가 별로 없구나라는 자괴감. 마지막으로 실험하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써댔던 물인데, 생각보다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 100가지를 써본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몰랐던가’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 주변의 소중한 것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을 안 하고 사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화학적 특성은 아니지만 지금 물의 특징 100가지를 다시 써본다면 다음 문장을 포함시킬 것이다. “있을 때는 아무 관심 없다가, 없어지면 죽도록 아쉬운 것.”